🏆 노벨경제학상으로 읽는 경제학 ⑧ — 2019년 바네르지·뒤플로·크레이머

가난한 지역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부에 예산이 있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교과서를 나눠주면 어떨까요? 무료급식을 제공하면 어떨까요? 교사를 더 채용하면 어떨까요?
모두 그럴듯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은 조금 다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방법이 정말 효과가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보면 안 될까?”
실제로 해봤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우리의 상식과 다른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연구로 아브히지트 바네르지(Abhijit Banerjee), 에스테르 뒤플로(Esther Duflo), 마이클 크레이머(Michael Kremer)는 2019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습니다. 수상 이유는 ‘세계 빈곤 완화를 위한 실험적 접근’이었습니다.
이들이 바꾼 것은 빈곤정책만이 아니었습니다.
경제정책도 ‘좋은 의도’에 머물지 않고 ‘실제 효과’를 검증해야 한다는 생각을 확산시켰습니다.
한국이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바라보는 지금,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습니다.
경제가 더 부유해진 다음에는 늘어난 경제적 자원을 어떻게 사용해야 사람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더욱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30초 핵심 요약 : 실험으로 바꾼 빈곤경제학]• 접근 방식: 거대한 구호 대신 무작위 대조실험(RCT)을 통해 현장에서 작고 구체적인 질문부터 검증했습니다.• 핵심 발견: 정책의 성과는 지원 규모뿐 아니라 ‘누구에게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 정책적 시사점: "얼마나 많이 지원할 것인가"에서 "어떤 방식이 사람들의 삶을 실제 개선하는가"로 관점이 전환되어야 합니다. |
경제학자가 케냐의 교실로 간 이유
1990년대 케냐의 한 학교를 떠올려보겠습니다.
교과서가 부족합니다. 아이들의 학업성취도도 낮습니다.
해결책은 너무 당연해 보입니다.
“교과서를 더 주자.”
마이클 크레이머와 연구진은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물었습니다.
“정말 그러면 성적이 오를까?”
학교들을 나누어 일부에는 교과서를 제공하고 그렇지 않은 학교와 결과를 비교했습니다.
결과는 예상만큼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교과서를 더 제공한다고 해서 모든 학생의 학업성취도가 크게 개선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면 이후 연구에서는 학생들의 실제 학습수준에 맞춘 보충교육이 상당한 효과를 나타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 하나가 나옵니다.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 진짜 문제의 원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정책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어디에 써야 하는지를 알아내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예방접종을 하면 렌틸콩을 드립니다
이번에는 인도의 농촌으로 가보겠습니다.
예방접종은 무료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모두 예방접종을 받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접종 장소가 멀거나 의료진이 언제 오는지 불확실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일을 포기하고 접종소까지 가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입니다.
연구진은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정기적으로 예방접종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접종을 받으러 온 가정에 렌틸콩 한 봉지와 같은 작은 인센티브를 제공했습니다.
거액의 현금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접종률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방접종의 미래 이익은 크지만 오늘 먼 길을 가야 하는 불편은 당장 느껴집니다. 작은 인센티브가 사람들이 그 마지막 문턱을 넘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데 반드시 큰돈이 필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경제학자가 어떻게 ‘진짜 효과’를 알아냈을까?
여기서 세 경제학자가 활용한 핵심적인 방법이 등장합니다.
무작위 대조실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RCT)입니다.
이름은 어렵지만 원리는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비슷한 학교 100곳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일부 학교에는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다른 학교에는 기존 방식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난 뒤 두 집단의 성적을 비교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학교에 프로그램을 시행할지를 가능한 한 무작위로 정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원래부터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많은 학교에 새 프로그램을 시행한 뒤 성적이 높게 나왔다면 프로그램 덕분인지 원래 학생들이 잘했기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경제학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여기에서 등장합니다.
“A와 B가 함께 일어났다”와 “A 때문에 B가 일어났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RCT는 이 둘을 구별하고 정책의 인과효과를 알아내기 위한 강력한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빈곤은 단순히 ‘돈이 없는 상태’일까?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가난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까요?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간단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합니다.
교육을 받고 싶어도 당장 생활비를 벌어야 할 수 있습니다.
아파도 하루 일을 쉬면 소득이 끊겨 병원에 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하고 싶어도 직업훈련을 받을 시간과 비용이 없을 수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오늘을 버텨야 하는 사람에게 미래는 너무 멀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빈곤은 단순한 소득 부족을 넘어 교육·건강·정보·금융·기회의 부족이 서로 얽힌 문제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빈곤정책이 생각보다 어려운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돈을 나눠주면 해결될까?
빈부격차와 복지정책을 논의할 때 흔히 두 주장이 맞섭니다.
한쪽에서는 말합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더 많이 지원해야 한다.”
다른 쪽에서는 말합니다.
“지나친 지원은 근로의욕이나 자립을 약화시킬 수 있다.”
어느 쪽이 맞을까요?
바네르지와 뒤플로의 접근은 이 논쟁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돌립니다.
“먼저 실제 결과를 확인해 보자.”
현금지원이 효과적인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교육이나 의료지원이 더 중요한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당장의 생계지원이 먼저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직업훈련과 취업기회가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복지를 늘릴 것인가, 줄일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구에게 무엇을 지원할 때 실제 삶이 가장 많이 개선되는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복지정책은 이념의 문제인 동시에 효과를 측정하고 비교해야 하는 경제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국민소득이 높아져도 빈곤정책이 필요한 이유
한국은 이제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국가 전체의 소득수준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성취입니다.
하지만 평균적인 국민소득이 높아진다고 빈곤 문제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가 발전한 사회에서도 실직이나 질병, 고령, 장애, 교육기회의 부족처럼 개인의 힘만으로 넘기 어려운 상황은 존재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소득·자산 격차와 청년의 기회, 노인 빈곤 등을 둘러싼 논의가 계속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복지정책의 질문도 조금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나 지원할 것인가?”에서 “어떤 지원이 실제로 삶을 바꾸는가?”로 말입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기 힘든 사람에게는 생계·의료·주거·돌봄 등의 사회안전망이 필요합니다.
반면 일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는 교육·직업훈련·재취업처럼 다시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조건 많이 주거나 적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지원을 제대로 전달하고, 그 지원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정책을 실험하면 될까?
물론 RCT가 모든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열쇠는 아닙니다.
케냐에서 성공한 교육정책이 한국에서도 똑같이 성공한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문화와 제도, 교육환경과 노동시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금리·환율·연금·조세처럼 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국민을 무작위로 나누어 시험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습니다.
또한 실험에는 윤리적인 문제도 고려해야 합니다.
따라서 2019년 노벨경제학상의 교훈을 “모든 정책을 RCT로 결정하자”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지나친 해석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정책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정책을 만들 때 좋은 의도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책이 시행된 뒤에는 한 가지를 더 물어야 합니다.
“돈을 얼마나 썼는가?”가 아니라 “문제가 얼마나 해결됐는가?”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정책을 바라보는 시선은 상당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작은 실험이 수백만 명의 삶을 바꾸다
바네르지·뒤플로·크레이머의 연구는 학술논문 속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연구와 관련된 교육 프로그램은 인도에서 500만 명이 넘는 어린이에게 보충교육의 혜택을 제공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방의료 분야에서도 현장실험에서 얻은 결과가 여러 정책에 활용됐습니다.
처음의 질문은 작았습니다.
“교과서를 더 주면 성적이 오를까?”
“예방접종을 받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하지만 작은 질문을 하나씩 검증하면서 수백만 명에게 적용할 수 있는 정책적 지식이 쌓였습니다.
이것이 세 사람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중요한 이유입니다.
거대한 빈곤 문제를 거대한 구호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질문으로 나누고, 현장에서 확인하고, 효과가 있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한 걸음 더
교과서를 더 나눠줬는데 평균 성적이 뚜렷하게 오르지 않았다면, 그 지원은 실패한 것일까요?
기대했던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면 다음 정책을 개선할 단서도 놓칠 수 있습니다.
어떤 학생에게 도움이 됐고, 어떤 학생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교과서를 활용할 준비가 된 학생과 기초학습부터 도움이 필요한 학생에게 같은 지원을 제공한다면 결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평균적인 효과가 작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학생에게 도움이 없었다고 결론 내릴 수도 없습니다.
지원 대상의 차이를 들여다보면, 물건을 더 제공하는 것보다 그것을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먼저 필요한 경우가 보입니다.
저는 이 연구들의 가치를 효과적인 정책을 찾아냈다는 데만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럴듯했던 설명이 실제 결과와 다를 때, 처음의 생각을 고쳐 나갔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효과가 작다는 결과를 감추지 않고 그 이유를 묻는다면, 다음 지원은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정책을 평가하는 일은 성공과 실패에 점수를 매기는 일이면서, 무엇을 바꿔야 할지 배우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핵심 경제학 용어 정리]• 무작위 대조실험 (RCT, Randomized Controlled Trial): 대상을 무작위로 실험집단과 비교집단으로 나누어 특정 정책이나 개입의 순수한 인과적 효과를 검증하는 과학적 연구 방법입니다.• 개발경제학 (Development Economics): 저소득국 및 발전도상국의 경제적·사회적 조건 개선과 빈곤 탈출 방안을 연구하는 경제학 분야입니다. • 인과관계 vs 상관관계 (Causality vs Correlation): 두 사건이 단순히 함께 일어나는 현상(상관관계)과 한 사건이 원인이 되어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관계(인과관계)를 구별하는 것은 정책 검증의 핵심입니다. |
참고자료
노벨상 공식 홈페이지, 「2019년 노벨경제학상 해설」 — 바네르지·뒤플로·크레이머의 빈곤 완화 현장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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