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지도를 펼쳐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나라는 높은 소득과 안정된 생활수준을 누리는 반면, 어떤 나라는 오랫동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천연자원이 많아서일까요? 기후가 좋아서일까요? 국민이 더 부지런해서일까요? 아니면 좋은 지도자를 만났기 때문일까요?
경제학자 다론 아제모을루(Daron Acemoglu)와 정치학자 제임스 A. 로빈슨(James A. Robinson)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에서 다른 답을 제시합니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제도(institutions)’입니다.
누가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지, 재산권은 제대로 보호되는지, 새로운 기업이 자유롭게 시장에 들어갈 수 있는지, 정치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는지에 따라 한 나라의 장기적인 성장 경로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제도만 만들면 모든 나라가 부유해질 수 있을까요?
이 질문까지 생각해보는 것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읽는 진짜 재미입니다.
[30초 핵심 요약 :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속 제도경제학]• 제도의 중요성: 국가 간 빈부격차의 결정적 원인은 지리나 기후가 아닌 사회적 '제도'의 차이에 있습니다.• 포용적 vs 착취적: 많은 이에게 기회와 성과를 보장하는 '포용적 제도'가 지속 가능한 성장과 혁신을 이끕니다. • 정치경제학적 접근: 착취적 제도가 유지되는 이유는 기득권 집단이 변화로 인한 권력 손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
같은 곳에 사는데 왜 삶은 이렇게 다를까?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합니다.
미국 애리조나주의 노갈레스와 국경 바로 건너편 멕시코 소노라주의 노갈레스입니다.
두 지역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습니다. 기후도 비슷하고 문화적 배경에서도 공통점이 많습니다.
그런데 주민들의 소득과 교육, 공공서비스, 치안 등 생활여건에는 상당한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저자들이 주목한 것은 국경선 자체가 아니라 국경선 양쪽에 형성된 서로 다른 제도였습니다. MIT의 최근 소개에서도 이 노갈레스 사례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대표적인 출발점으로 설명됩니다.
같은 지역에 살아도 어떤 법과 정치제도 아래에서 경제활동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선택과 기회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례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국가의 번영을 결정하는 것은 단순한 지리적 조건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제도일까?
포용적 제도와 착취적 제도
저자들은 제도를 크게 포용적(inclusive) 제도와 착취적(extractive) 제도로 구분합니다.
포용적 경제제도에서는 비교적 폭넓은 사람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재산권이 보호되고, 교육받을 기회가 있으며, 새로운 기업이 시장에 진입하고, 자신의 노력과 아이디어로 얻은 성과를 어느 정도 자신이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사람들이 교육을 받고 투자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유인이 커집니다.
반면 착취적 제도에서는 정치권력과 경제적 기회가 일부 집단에 집중됩니다.
열심히 일하거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도 그 성과를 빼앗길 가능성이 크다면 사람들은 장기적인 투자와 혁신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렵습니다.
노벨위원회 역시 이들의 연구를 설명하면서 법치와 폭넓은 경제적 자유를 갖춘 제도가 장기적인 번영에 유리하고, 소수 엘리트가 권력을 독점하는 착취적 제도는 장기 성장에 불리하다는 점을 핵심으로 제시했습니다.
남한과 북한은 무엇을 보여줄까?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비교 사례는 남한과 북한입니다.
두 지역은 같은 한반도에 있고 오랫동안 역사와 언어, 문화적 배경을 공유했습니다.
그러나 분단 이후 서로 다른 정치·경제제도를 발전시켰고 장기간이 흐른 뒤 경제적 성과에는 큰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이 사례는 기후나 민족성만으로 경제적 성과의 차이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남한은 좋은 제도, 북한은 나쁜 제도였기 때문에 모든 차이가 발생했다”고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습니다.
전쟁, 국제질서, 대외교역, 산업화 전략, 교육과 인적자본 축적 등 여러 요소도 경제발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도론의 중요한 의미는 다른 요인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왜 비슷한 출발조건을 가진 사회가 장기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틀을 제공한다는 데 있습니다.
나쁜 제도라면 왜 고치지 않을까?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착취적 제도가 경제발전에 좋지 않다면 지도자들이 좋은 제도로 바꾸면 되지 않을까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어떤 제도가 국가 전체에는 비효율적이더라도 그 제도로 큰 이익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유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존 권력자가 새로운 기업의 시장 진입을 허용하고 국민에게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주면 경제 전체에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권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 전체의 이익과 권력을 가진 집단의 이익이 충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가 단순한 경제성장론을 넘어 정치경제학의 책인 이유입니다.
노벨위원회도 착취적 제도가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에 불리한데도 지속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권력을 가진 집단의 이해관계와 신뢰 문제를 중요한 요소로 제시했습니다.
경제성장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을까?
보통 정치지도자는 경제가 성장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과 산업이 등장하면 경제 전체의 생산성은 높아질 수 있지만 기존 산업과 기업의 지위는 흔들릴 수 있습니다.
철도가 등장하면 마차산업이 영향을 받고, 새로운 유통기업이 등장하면 기존 상인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경제학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라고 부릅니다.
새로운 산업과 기술은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지만 동시에 기존의 경제적·정치적 권력관계를 바꿀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존 제도에서 이익을 얻고 있는 집단은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되는 혁신이라도 자신의 지위를 위협한다면 반대할 유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결국 경제성장의 문제는 기술과 자본의 문제만이 아니라 누가 변화의 이익을 얻고 누가 기존의 권력을 잃는가라는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착취적 제도에서는 경제성장이 불가능할까?
그렇다면 착취적 제도를 가진 국가는 항상 가난할까요?
이 역시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정부가 자원과 노동력을 특정 산업에 집중하거나 이미 존재하는 기술을 빠르게 도입하면서 일정 기간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지속성입니다.
장기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기업이 등장하고 기존 기업에 도전하며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혁신은 기존 권력관계를 흔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치·경제적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된 사회에서는 어느 시점부터 혁신을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저자들이 단순히 “성장했는가?”보다 “어떤 제도 아래에서 어떤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보는 이유입니다.
제도만 좋으면 국가가 성공할까?
여기서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주장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의 경제발전을 설명해 온 경제학에는 여러 관점이 있습니다.
지리와 기후, 질병환경, 문화와 사회적 신뢰, 교육과 인적자본, 천연자원, 국제무역과 세계정세 등도 경제발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장기 발전을 설명하는 경제학 연구에는 이러한 다양한 접근이 존재합니다.
아제모을루와 동료들의 연구는 이러한 설명 가운데 제도의 중요성을 강하게 보여주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식민지 시기의 제도 차이가 이후 장기적인 경제성과와 연결되는지를 분석한 연구는 경제발전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국가 발전을 하나의 변수만으로 완벽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제도는 역사와 문화의 영향을 받고, 지리적 환경이 제도 형성에 영향을 줄 수도 있으며, 경제발전이 다시 제도를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제도가 전부다”라고 이해하기보다는 “제도가 장기적인 번영을 설명하는 핵심 요인 가운데 하나다”라고 이해하는 편이 균형 잡힌 접근입니다.
좋은 경제정책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이유
이 책이 오늘날에도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경제문제가 발생하면 흔히 좋은 정책을 찾습니다.
세금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규제를 얼마나 완화할 것인가, 복지를 얼마나 확대할 것인가, 어느 산업에 투자할 것인가를 논의합니다.
물론 좋은 정책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특정 집단이 정책결정 과정을 장악하거나 경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재산권과 법치에 대한 신뢰가 약하다면 기대한 효과를 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정책을 평가할 때 한 단계 더 깊은 질문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좋은 정책인가?”
그리고 그다음에는,
“그 좋은 정책이 실제로 선택되고 지속될 수 있는 제도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2024년 노벨경제학상이 다시 주목한 ‘제도’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가 출간된 것은 2012년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이론적 토대가 된 연구는 이후 경제학계에서 더욱 큰 평가를 받았습니다.
2024년 노벨경제학상은 다론 아제모을루, 사이먼 존슨(Simon Johnson), 제임스 A. 로빈슨에게 돌아갔습니다. 수상 이유는 제도가 어떻게 형성되고 번영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한 공로였습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자체에 노벨상이 주어진 것은 아니며, 아제모을루와 로빈슨이 존슨과 함께 오랫동안 축적한 학술 연구가 수상의 기반입니다.
이는 한 나라의 부를 설명할 때 공장과 자본, 기술만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새로운 아이디어에 도전할 수 있는가.
노력의 성과를 보호받을 수 있는가.
새로운 기업이 기존 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가.
그리고 정치권력이 지나치게 한곳에 집중되지 않는가.
이러한 제도의 문제 역시 장기적인 경제성장의 중요한 조건입니다.
[경제고전 속 핵심 철학·경제 용어]• 포용적 제도 (Inclusive Institutions): 사유재산권을 보호하고 법치를 확립하며 대다수 국민에게 경제활동 및 투자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입니다.• 착취적 제도 (Extractive Institutions): 소수 엘리트 집단이 정치·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다수의 소득과 자원을 수탈하는 구조의 제도입니다. • 창조적 파괴 (Creative Destruction): 새로운 기술과 혁신이 기존의 산업과 권력 구조를 대체하며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는 경제적 과정입니다. |
한 걸음 더
계약할 때 정한 검수 기준이 일을 마친 뒤 일방적으로 바뀌는 거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업체는 약속에 맞춰 비용을 들였는데, 대금을 받을 조건이 달라집니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다음 거래에서는 추가 비용을 요구하거나 참여 자체를 피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기준이 분명하고, 담당자가 바뀌어도 같은 약속이 적용되며, 이견이 생겼을 때 해결할 절차가 있다면 장기적인 거래를 계획하기 쉬워집니다. 제도는 규정의 개수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 규정을 믿고 행동할 수 있는지에서 힘을 얻습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제도론도 이런 관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노력하면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가, 새로운 참여자도 같은 기준을 적용받는가, 권한을 가진 사람이 약속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는가. 경제의 활력은 좋은 기회와 함께 그 기회에 도전해도 된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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